다시 주운 금반지


 언제부터인가 임신한 아내의 몸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원주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하는 처남을 면회 다녀와서 피곤하였나 생각했다. 찌는 듯한 오뉴월 프라이드 좁은 차에 장인, 장모님 모시고, 음식이며, 음료수이며 한 짐을 싣고 새벽부터 출발했다. 휴가철 영동 고속도로는 건강한 사람도 참기 힘들만큼이나 차들로 몸살을 앓았다. 두어 시간 남짓한 거리를 서너배의 시간을 더 주고서야 겨우겨우 점심시간에 맞추어 처남이 복무하는 부대에 도착했다. 그 날 이후부터이다. 아내의 몸이 눈에 띄게 부어 오른가 싶다. 정기검진을 받던 날 의사가 어두운 얼굴로 큰 병원에서 진찰받기를 권한다. 그리고 아내는 바로 충대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임신중독증’을 아내는 앓고 있었던 것이다.

 입원 후 바로 아내의 병세는 악화되어 호흡곤란과 고열로 사경을 헤메는 지경에 이르렀다. 담당의사는 아기는 포기하라고 냉정하게 말을 한다. 그리고 어떠한 의료사고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서약서 종이에 기어코 나의 서명을 받아내고서야 수술실 문을 열었다. 수술이 시작 된지 한 시간이 채 되지 못하여 간호사가 급히 인큐베이터를 수술실로 끌고 들어가고, 곧이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아이가 수술실문을 나왔다. 아이는 곧 바로 미숙아 실로 실려 가고, 아이의 큰 고모가 아이를 쫗아 간다. 나는 참아 아이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다. 1.48kg의 몸무게로 7개월만에 홀로는 호흡도 하지 못한 채 나의 딸아이는 이 세상을 맞이하였다.

 아내의 병세는 수술후 곧 안정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내를 퇴원 시킨 후  곧 딸아이를 찾았다. 딸아이의 모습은 너무 작아서 인지 지금까지 보아온 조카들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보였다. 저렇게 작은 아이가 살아 갈수 있을 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행히 아이는 하루 만에 정상적인 호흡을 하였다고 한다. 곧이어 의사와 면담을 가졌다. 의사는 미숙아는 장애아로 성장할 확률이 높다는 것과 심장쪽 질환의 발병율이 정상적인 아이에 비해 두서너베 높다는 등 잔뜩 겁을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내내 무겁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 딸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비롯 키가 제일 작아 맨 앞줄에 서지만, 사지 멀쩡하게 자라났다.

 어머니가 꿈을 꾸셨다고 했다. 어머니가 길을 가는 중에 길가에 너무나 이쁜 금반지가 떨어져 있기에 얼른 주어 호주머니에 넣어 셨단다. 이를 지켜 보던 작은 어머니가 “형님, 그거 금반지 아녀요. 버리세요.”라는 말에 어머니는 그 금반지를 버리셨단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꾸만 버린 반지에 미련을 놓지 못하고, 급히 다시 주우셨단다.  반짝이는 것이 금반지가 분명하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모일  때 종종 우리 딸아이의 태몽을 말씀 하신다. 

 나는 우리 딸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 할지 모른다. 그렇게 학업성적이 우수한 것도 아니고, 키가 늘씬하게 자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다시 주운 금반지임에는 틀림없다. 사람들에게 금은 무척이나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지 결혼하는 이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평생 아끼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증표로 또한 부의 소망을 담고서 금반지를 예물로 사용하지 않나 싶다. 우리 딸아이도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귀하게 여겨지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오늘도 소망 한다.

 나는 오늘도 딸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소리 지르고, 도끼눈을 하며 윽박지른다. 딸아이는 잔뜩 긴장하며 풀리지 않는 문제에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잔뜩 기가 죽은 딸아이의 모습이 애처로울때도 있다. 그래도 딸아이는 할머니가 다시 주운 소중한 금반지 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