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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Cage (1912-1992), 초연은 1952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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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대상으로 격상된 예술작품이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반복적으로 작동하여 물리적으로는 프레임안의 물감의 조합을 신성한 경지로 끌어올리고 그 공간적 대상을 물신주의적으로 고착시켰다. 예술작품의 소재라는 상징체계의 바깥에 있는 보잘것 없고 기능적인 사물을 그 자리에 놓음으로써 빈구멍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우리는 변기를 보고는 변기너머의 무엇을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공백이 있을 뿐이다. 물신적 도착의 뒤에는 공백만이 있다는, 그 결여가 도착행위의 핵심이라고 라캉은 얘기한다. 그 결여에 걸맞는 시니피앙의 발굴과  끊임없이 교체라는 삶의 원환적 행위를 뒤샹은 포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예술이라는 허구성의 폭로라는 통쾌함보다는 '허구성'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무시'를 당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림속의 '샘', 즉 '변기'는 잠재적 대상이다. 우리는 저 대상에 '변기잖아'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보류하게 된다. 저것은 비록 화장실이라는 현실적 대상의 부분에서 발췌한 것이지만 결코 현실적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저건 변기네'라고 읇조려봐야 의미있는 발화행위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샘'이라는 제목으로 더 의아함을 낳게 되는 저것은 부분대상, 쪼개진 대상이다. 즉 상징체계의 부분으로 환원되지 않는, 미술의 모자이크를 채우는 한조각이 아닌 것이다. 즉, 라캉이 말하는 <대상a>다. 우리는 저것의 의미구성에 계속해서 실패한다. 미술작품의 신화, 액자속의 물감들의 조합, 또는 단상위의 청동의 형상이 반복적으로 구성해놓은 아우라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저것은 명명되지 않고 '채워져야할 무엇'이라는 결여의 구조, 팔루스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아서단토의 통시적 시각에서는 뒤샹의 우상파괴의 퍼포먼스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점을 필연적 과정으로 환원시킬 것이다. 즉, 소박한 유머에 불과할 수도 있는 작은 균열과도 같은 저 작품이 '누구나 동의하는 예술작품이라는 거대서사의 종말, 모든 예술가들이 에너지를 투사하던 예술작품의 감상이라는 특권적 자리의 몰락의 필연적 이유를 재구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열된 예술작품의 신화에 집중된 에너지를 해소하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 20세기의 예술이 처한 당위인가라는 질문도 떠오른다.